인물사전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작곡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조국인 폴란드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쇼팽을 기념하기 위해서 5년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3대 콩쿨 중 하나이다.
생애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레데리크 쇼팽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부터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 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 들어가게 된다.
교육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악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좋아하던 소프라노가 있었고, 실제로 썸까지 가게 되었지만 결국 파리로 떠나게 되면서 헤어지게 된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본 쇼팽은 결국 폴란드는 자신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끝까지 자신은 폴란드에 남겠다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구들과 부모님, 그리고 스승의 설득에 의해 결국 파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가 떠나며 친구들에게 작곡한 곡이 그의 연습곡 Op.10-3, '이별의 곡'이다.
파리로 떠나는 길에 그는 빈을 들리는데, 그의 조국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바로 길을 돌려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파리까지 마중하려고 같이 간 친구가 크게 말렸다. 이때 쇼팽은 잠시 멈춰 고민했지만, 그 사이에 이미 마차는 출발했고, 쇼팽은 빈에 혼자 남게 된다. 그 후, 쇼팽은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 아니 북이라도 치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파리로 가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1831년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연습곡 Op.10-12,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파리에서의 생활
파리에서의 쇼팽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바로 성공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혁명이 일어난 후, 쇼팽으로부터 그의 부모님은 지원을 더이상 할 수 없었고, 그저 파리에 버려진 것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폴란드는 당시 음악적으로 전혀 선진국이 아니었고 그런 국가에서 온 음악가라고 하니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한 위대한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프란츠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쇼팽을 발견한 후, 전혀 유명하지 않은 그를 파리의 사교계와 음악계, 귀족 사회에 넣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이로 인해 쇼팽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대한 독주회를 많이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어쩌면 쇼팽은 그가 원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때이다. 리스트의 도움으로 인해,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리스트를 제외하고는 멘델스존,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당시 쇼팽, 리스트, 멘델스존, 베를리오즈를 모아 리스트는 '낭만파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미래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10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굉장히 길게 이어가던 쇼팽과 리스트의 친구 관계도 이때 틀어지게 되는데, 마리 다구와 리스트가 연애 중일 때 마리 다구가 리스트에게 쇼팽을 모함하며 그 둘의 사이는 정말 극악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그 둘은 절교를 하게 되었지만, 리스트는 죽을 때까지도 쇼팽을 음악적으로도, 그리고 친구로서 사랑하였고 그가 여는 모든 독주회에서는 꼭 한 개 이상의 쇼팽의 곡을 넣었다고 한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네 개의 전주곡(Op.28)을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인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콜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가 전달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행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작품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여기서 녹턴은 3~4분 내외의 짧고 간결한 21개의 곡으로 구성되어있다.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 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é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 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었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었다. 실내악에 관해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악기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 된 리스트는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치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쇼팽은 플라이엘이 만든 피아노를 가장 아꼈다. 장인 정신으로 빚어낸 플라이엘의 수제 피아노 고객명단에는 쇼팽 뿐 아니라 리스트, 스트라빈스키 등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유럽의 수제 피아노 업체들은 중국산에 밀려 사실상 고사 상태가 된 지 오래다. 20세기 초반에 유럽에 존재하던 피아노 제작 회사들 3백여 업체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곳은 9개에 불과하고(2013년 기준), 플라이엘도 2013년을 끝으로 마지막 남은 작업장을 닫기로 결정했다.
작품 목록
피아노 독주곡
- 21개의 녹턴 - Op.9에 속하는 3곡, Op.15에 속하는 3곡, Op.27에 속하는 2곡, Op.32에 속하는 2곡, Op.37에 속하는 2곡, Op.48에 속하는 2곡, Op.55에 속하는 2곡, Op.62에 속하는 2곡, Op.72에 속하는 1곡, Op. 없는 2곡
- 58개의 마주르카
- 4개의 발라드 - Op.23의 사단조, Op.38의 바장조, Op.47의 내림 가장조, Op.52의 바단조
- 1개의 뱃노래 - Op.60의 올림 바장조
- 1개의 자장가 - Op.57의 내림 라장조
- 1개의 볼레로
- 2개의 부레
- 3개의 소나타 - Op.4의 다단조, Op.35의 내림 나단조, Op.58의 나단조
- 4개의 스케르초 - Op.20의 나단조, Op.31의 내림 나단조, Op.39의 올림 다단조, Op.54의 마장조
- 3개의 에코세즈
- 27개의 연습곡 - Op.10에 속하는 12곡, Op.25에 속하는 12곡, 작품번호가 없는 3곡
- 20개의 왈츠
- 26개의 전주곡 - Op.28에 속하는 24곡과 Op.45의 올림 다단조 한곡과 Op.없는 내림 가장조 한곡
- 4개의 즉흥곡 - Op.29의 내림 가장조, Op.36의 올림 바장조, Op.51의 내림 사장조, Op.66의 올림 다단조. 이 중 4번째 곡인 Op.66은 환상즉흥곡이라는 부제로 매우 유명하다.
- 18개의 폴로네이즈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Andante spianato and Grande polonaise brilliante>와 환상 폴로네이즈를 제외한다면 16개
- 1개의 푸가
- 1개의 환상곡 - 작품 49, 바단조
피아노와 관현악
- 2개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 4개의 다른 작품 - 《Là ci darem la mano》에 의한 변주곡, 《Krakowiak》, 《Grande Fantaisie on Polish Airs》, 《Andante spianato and Grande Polonaise brillante》에 의한 변주곡, (폴로네이즈로 분류된다면 제외)
가곡
- 17개의 피아노와 성악을 위한 폴란드 노래
실내악
- 1개의 피아노 트리오(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 1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 2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쇼팽 서명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0%88%EB%8D%B0%EB%A6%AC%ED%81%AC_%EC%87%BC%ED%8C%BD
프레데리크 쇼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쇼팽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의 단편소설작가에 대해서는 케이트 쇼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édéric François Chopin,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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